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귄터 폰 클루게 (문단 편집) == 평가 == * 클루게는 두려움을 모르는 군인이었다. 진두에 앞장서서 돌격을 지휘한 적도 많았고, 심지어 소련군 기관총 탄환이 자신의 주위에 쏟아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에 임했으며, 피젤러 슈토르히에 탑승하였을 때 소련군 파르티잔에 의해 몇 차례 기체가 피탄되었음에도 평상심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는 클루게가 대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추종자인 것에 기인하기도 했는데 클루게는 나폴레옹 관련 기록을 모조리 외우고 있었으며 프랑스와 소련에서도 나폴레옹에 관련한 역사적 명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르제프 공방전 당시 클루게의 부하였던 발터 모델은 [[나폴레옹 전쟁]]의 승자인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 원수에 관한 논문을 전간기에 발표해서 주목을 받을 만큼 소문난 그나이제나우 추종자였다. *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 클루게는 히틀러와 직접 통화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지금의 상황이 이렇단 말입니다! 총통께서는 당신만의 몽상 세계 속에서 헤매고 계시군요!"''' 그야말로 쉴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쏘아붙였다고. * 다만, 클루게는 히틀러와 직접 대면하기만 하면 "나는 그에게 현혹되는 것 같군. 총통과의 대화가 끝나고 기억해 보면 내가 그의 의도대로 말했다는 기억밖에 없었어."라고 고백할 만큼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클루게 한 사람만의 문제점도 아니어서 대부분의 독일 국방군 장성들이 히틀러 앞에서만은 꼬리를 내렸다. [[하인츠 구데리안]]만 해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 앞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아쉬워했을 정도이니. [[알베르트 슈페어]]는 이러한 히틀러의 면모가 단숨에 독일 정권을 휘어잡고 간혹 천재성을 발휘하는 카리스마에 기반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 그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https://en.wikipedia.org/wiki/G%C3%BCnther_Blumentritt|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은 클루게는 [[아돌프 히틀러]]에 적대적이지는 않았으나 [[나치당]], 특히 [[하인리히 힘러]]의 [[아리안]] 신비주의에 반대했다고 한다. 클루게가 자결하기 얼마 전에 자신의 참모들에게 고백한 바에 따르면 '암살자 그룹'은 1943년도에 2번,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실행을 제시해 왔는데 한 번은 그의 영지, 한 번은 [[스몰렌스크]]였다고 한다. 스몰렌스크에서 클루게가 거절[* 히틀러를 암살하기엔 독일군에도 독일 국민에게도 너무 이른 시기라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며 트레슈코프를 만류하였고, 하인리히 힘러를 히틀러와 동시에 제거해야만 SS와 독일 국방군의 내전을 막을 수 있다고 클루게가 설득하였다고 한다.- Joachim Fest, Plotting Hitler's Death]한 후 자신은 더 이상 암살자들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전후 [[리델 하트]]의 기록에 따르면 클루게의 이름은 1942년에 이미 암살자들의 명단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클루게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이들은 클루게의 능동적인 참여보다는 [[헤닝 폰 트레슈코프]]의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암살자들이 작성한 내각 명단에 전혀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던 알베르트 슈페어의 이름도 있는 등 동참의사를 밝히지 않은 주요 공직자들이 올라가 있었고, 에르빈 롬멜을 비롯한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경우가 많아서 당시 독일군 지휘가 공백에 빠지는 원인이 된다.] * 서부전선에서의 클루게는 히틀러가 의심했던 '연합군과의 항복을 협상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신병을 [[게슈타포]]에 넘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만큼 군인으로서 완고한 면모의 소유자였다. 특히 클루게는 동부전선에서부터 항상 독약을 상비하고 다녔는데 '''"내가 중상을 입어서 움직이지 못할 경우 소련군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귀관들이 나를 사살하라. 내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다만 영미 연합군 측에선 1944년 8월 중순 전후에서 '독일군 측 사절과 항복에 대해 논의하려 했지만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무산됐다'는 내용이 전후 패튼과 몽고메리의 수행 장교들에 의해 공개됐는데 여기에 클루게가 어느 선까지 관여했는지, 클루게는 알지 못한 채 부하 장교들이 암약한 것인지는 확인 되지 않은 채이다. 당시 서부전선 총사령부 장교들은 상하를 가리지 않고 영미 연합군과의 전투에 회의적인 경향이 강했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전후로 항복 혹은 항전이라는 선택지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암살 혹은 협상에 대한 모호한 입장은 클루게 뿐만 아니라 롬멜에게도 동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오늘 날에도 큰 논란으로 자리잡고 있다. * 전술한 대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자신의 후임이 될 사람은 클루게밖에 없다고 공언하였고, 소련군의 [[게오르기 주코프]]가 중부집단군을 소련의 공적 1호로 생각할 만큼 당대에는 독일 국방군 장성들 중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그저 히틀러 암살 사건에서 입장을 바꾼 기회주의적 면모만이 강조되고 있고 특히 철천지 원수인 구데리안이 회고록에서 클루게를 열심히 비난한 내용이 두드러지게 언급되고 있다.[* 물론 구데리안의 입장에서도 사사건건 자신에 반대한 클루게에게 굉장히 쌓인게 많았다.] 이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군사 문서의 손실도 상당했을 뿐 아니라 중부집단군 출신 지휘관들이 종전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전사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중부집단군의 전적을 다룬 회고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만슈타인 휘하의 남부집단군에 비해 이들의 전과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그의 명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게 된다."''' 블루멘트리트는 실러의 문장을 인용하며, 클루게 또한 이에 해당한다고 평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